정조효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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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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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정조 효 문화제
  • 문화재이야기

정의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륭원 옆에 세운 경기도 화성의 절.

개설

용주사(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화산에 있다. 856년(신라 문성왕 18) 길양사(葛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952년(고려 광종 3)에 불에 타버렸다. 그 후 조선후기에 이르러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갈양사 터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였다. 건립 비용은 관료와 백성들의 시주를 받아 충당하였다. 창건 이후 용주사는 왕실의 비호 하에 당시 불교계의 승풍(僧風)을 선도하는 중요 사찰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신라시대에 창건된 용주사는 고려시대 들어 952년에 소실되었다. 그러나 고려전기의 고승이자 국사(國師)였던 혜거(惠居)가 970년 이 절에 온 뒤 "물이 맑고 산이 아름다워 만대에 복된 터가 될 것"이라며 왕실에 절의 중건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971년(고려 광종 22) 갈양사를 중건한 뒤, 승방 혜거헌(惠居軒)을 차리고 머물다가 이 절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혜거는 이 절이 산수가 수려하여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이니, 신에게 제사를 지내 복이 내리는 도량이 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에 광종은 금과 함께 조 500석, 면포 60필, 전결 500석을 내려 불상과 탑과 전당과 누각을 모으고 수리하니, 그 모습이 장대하고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이듬해에는 용주사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를 국가적 불교 행사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952년(고려 광종 3)에 큰 불이 나서 전소되었다.

변천

길양사는 조선후기까지 폐사지로 남아 있었으나 정조대에 왕실원당으로 중건되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고 이듬해 명복을 비는 용주사를 그 곁에 창건하였다.

조정에서는 용주사의 건립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공명첩 250장을 발급했으며, 대규모로 관료와 백성들의 시주를 받아 비용에 보태었다. 용주사 창건에는 당대의 주요 관료들이 상당수 동원되었다. 당시 시주자이자 참여자 명단이기도 한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 의하면 경기감사서유방 등 각 도의 감사 9명, 군수, 현감, 부사, 만호, 첨사 등 지방 관료 87명을 더하여 모두 96명에 달하는 관료의 관직명과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에는 각 궁과 중앙 관청 그리고 지방 감영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다. 결국 전국에서 거둔 시주금은 총 86,505냥 1전이었다. 그리고 전국의 백성과 사찰에서도 13,779냥 9전의 시주를 걷었다. 이 가운데 57,388냥 8전은 건축비로 썼고, 28,116냥 3전은 절에서 소유할 전답 매입비로, 2,000냥은 화주승들의 여비로 충당하였다. 용주사는 3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절에 불상을 조성한 후에는 당대의 고승이었던 인악의첨(仁岳義沾)에게 불복장발원문(佛腹藏發願文)을 짓도록 명하였다. 당시 인악은 불상을 증명하는 소임을 맡아 불상에 들어갈 발원문을 지었는데 정조가 이를 보고 문장이 유려하고 뜻이 시원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상을 내렸다. 정조 자신은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를 직접 짓고 써서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명복을 빌었다. 정조는 이 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게어(偈語)를 지음으로써 보은의 불공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 글은 현재 용주사에 보관되어 있다.

정조는 또한 부모 은혜의 크고 깊음을 가르치는 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세 판본을 판각하여 이 절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용주사를 창건하기 전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승려 보경(寶鏡)이 바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용주사 창건에 이르러 보경을 용주사의 총공사 및 시주금 수납을 책임지는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 및 용주사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았다. 그리고 절이 완공된 후에는 『부모은중경』을 판각하여 이 절에 소장하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金弘道)에게 불전(佛殿)의 탱화를 그리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용주사에 남아 있다.

한편 용주사는 창건 당시부터 불교계를 관리했던 5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곳이 되었다. 당시 5규정소는 광주 봉은사, 양주 봉선사, 남한산성 개운사, 북한산성 중흥사, 수원 용주사였다. 규정소란 곧 율사(律寺)로 승려의 과실을 규찰하고 바로잡는 곳이다. 자장율사가 통도사(通度寺)에 있으면서 승려를 통치한 것처럼 승려와 관련된 일체를 규제하였다. 모든 승려의 우두머리로 순사(巡使)를 파견하여 지방의 사찰을 두루 점검하고 승려의 과실에 관한 일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당시 불교 종단에 관련한 일들은 다섯 규정소의 책임자가 도회소에 합석하여 결정하였다.